| 일차 | 행선지 | 일정 | 식사 |
|---|---|---|---|
| 1일차 4월 20일 (월) | 부산 |
17:00 부산 국제여객터미널 3층 부관훼리 카운터 앞 출국수속
※선상 부흥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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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선내식 |
| 2일차 4월 21일 (화) |
시모노세키 히라도 |
시모노세키 국제여객터미널 도착 → 일본 입국수속 → 히라도로 이동 지비에르 기념성당, 최초의 교회터, 기무라집터, 야이자 화영장 HOTEL히라도 란푸, 해상, 키쇼테이 |
(조) 선내식 (중) 현지식 (석) 호텔식 |
| 3일차 4월 22일 (수) | 나가사키 |
나가사키 / 오무라 이동
※수요저녁예배※
무라카미 천주당, 평화공원, 원폭자료관, 26성인 순교지, 스즈타감옥터, 처자이별바위, 머리무덤, 몸통무덤, 호쿠바루 처형장
HOTEL나가사키 일승관 또는 동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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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호텔식 (중) 현지식 (석) 호텔식 |
| 4일차 4월 23일 (목) |
후쿠오카 시모노세키 |
후쿠오카 / 시모노세키 이동
오무라 천주당, 캐널시티, 면세점
19:30 시모노세키항 도착 / 출국수속
※선상 부흥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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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호텔식 (중) 현지식 (석) 선내식 |
| 5일차 4월 24일 (금) | 부산 |
08:00 부산 국제여객터미널 도착 → 입국수속 후 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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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선내식 |
| 객실타입 | 구분 | 금액 | 비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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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등실 (다인실) |
대인 | 780,000원 |
※ 소인(만 12세미만)
※ 소인의 경우, 성인 2명과 한 방 사용 조건 ※ 유아(24개월까지) |
| 소인 | 730,000원 | ||
| 유아 | 100,000원 |
| 1549년 1550년 |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선교사 카고시마 상륙 하비에르 히라도로 거점 이동 |
| 1587년 | 도요토미 히데요시 선교사 추방령 |
| 1597년 | 도요토미 히데요시 금교령, 26성인 순교 |
| 1614년 1629년 |
도쿠가와 바쿠후 금교령 나가사키 교회 박해 후미에(에부미 초상 밟기) 시작 |
| 1633년 | 쇄국령 |
| 1637년 | 시마바라난 |
| 1657년 | 오무라 박해 |
| 1805년 | 아마쿠사 박해 |
| 1867년 | 우라카미 박해 |
| 1873년 |
크리스천 금제고찰의 철폐 신교의 묵인 |
| 1889년 | 제국 헌법 발포, 신앙의 자유 |
| 1945년 |
나가사키 원폭 세계 제 2차 대전 종전 |
나가사키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기독교 박해와 원폭 투하!
우라카미에는 평화공원과 원폭 자료관 등
역사적인 볼거리가 많은 곳 입니다.
히라도는 일본 나가사키 현 북서부에 있는
히라도 섬의 항구 도시로 17세기 이전부터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과의 무역 교류가 활발했던 곳이며,
본격적인 기독교 선교의 출발지로 역사적인 기념물과
순교지가 많은 아픔이 도시 입니다.
시 전체가 삼각형 모양의 선장지로 나가사키의 문이자
세계 최초의 해상공항인 나가사키 공항 인근에 위치해 있습니다.
현의 중앙에 있으면서 나가사키와 사세보와의
교통이 편리하게 연결되어
나가시현 순교지 순례의 거점이 되는 곳입니다.
일본 최초의 크리스천 다이묘(영주)인
오무라 스미타다의 관저가 있고,
곳곳에 기독교 박해 유적지들이 있는
곳 입니다.
일본 나가사키(長崎)현 고토(五島) 열도는 신앙의 섬입니다.
일본 전체 복음화율은 2012년 통계에 따르면
0.3%(43만여 명)에 불과합니다.
이에 비해 인구 6만여명인 고토열도 복음화율은
14.4%(9000여명)에 달합니다.
극심한 고문과 탄압 속에서도 신앙을 지킨 선조들의 뜻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 입니다.
히가시소노기에서 배를 타고
이곳에서 하선, 육로로 니시자카로 향한 곳이다.
이후 해상 간척으로 인하여 현재의 위치로 이동 되어져있다.
나가사키역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위치해 있으며,
1597년 2월5일 도요토미히데요시의 기독교 금지령에 의해서 순교한 6명의 선교사와
20명의 일본 성도를 추모하기 위하여 1962년에 건립되었다.
토요토미히데요시의 기독교 금교령으로
1597년 1월 교토와 오사카에서
스페인 출신의
베드로 바우치스타 선교사를 포함한
24명의 크리스천들이 체포된다.
1월 9일, 사카이를 출발한 순교자들은 사카이, 히메지, 오카야마, 히로시마를 경유해, 1월 31일 하카타에 도착하는데,
다음 날 히젠 나고야 인근 마을인 야마모토에서 두 명이 크리스천임을 밝히고 스스로 순교를 택하면서 모두 26명의 크리스천이 처형장으로 향하게 된다.
한 달 가까이 순교의 길을 걸어 온 이들은 처형되기 전날 우레시노의 힘든 산길을 올라
오무라령의 타와라자카 고개를 넘어 나가사키 가도의 도선장이었던 히가시소노기에 도착하기에 이르고,
소노기 해변에 당도한 26성인은 세 척의 배에 나누어 태워진 채 오무라만을 건너 건너편의 토키츠 해변을 향해 나아간다.
다음 날인 2월 5일 정오 무렵 26인의 순교자들은 나가사키의니시자카에서 십자가에 달려 창에 찔린 채 순교하였다.
일본 외교무역을 가장 먼저 성공시킨 히라토의 영주 마츠우라 타카노부의 저택이었던 곳으로 사료박물관으로 개장되었습니다.
박물관 안에는 1587년 6월 19일 발령된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크리스천 금제의 정서(선교사 추방령) 원본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정서의 본문은 - ‘기독교의 선교를 금하며,
선교사들을 20일 이내에 일본으로부터 추방할 것.
그러나 남만선(포르투갈선)에 의한 무역은 계속해서 용인할 것이며,
기존의 크리스천의 신앙은 유지해도 좋다’-라는 내용으로 ‘금교장상(선교는 금지하되 무역은 장려함)’이 목적이었습니다.
카밀로 콘스탄치오 선교사가 화형된 야이자 언덕에 야이자 공원의 순교기념비가 서있는 곳 입니다.
※ 카밀로 콘스탄치오 선교사는?
이탈리아 출신인 카밀로 콘스탄치오 선교사는 1605년 일본에 들어와 선교 활동을 하던 중
1614년 토쿠가와 막부의 금교령에 의해 마카오로 추방되었습니다.
이후 1621년 다시 일본으로 돌아오지만
사가와 이키츠키에서 선교 하던 중 체포되어 화형을 당하였으며, 그가 순교하기 전 일본어와 포르투갈어, 네덜란드어로 전한
설교를 통해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으며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고 영원한 생명의 삶을 살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했다고 전해집니다.
5년간 35명의 전도사와 성도가 갇힌 감옥
이 감옥에는 1671년 7월부터 1622년 9월까지의 5년간 전도사, 성도 35명이 갇힌 곳 입니다.
전도사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길이가 5.3m, 넓이가 3.5m 라는 아주 좁은 공간에 많을 때는 33명의 사람이 갇혀있었습니다.
옆으로 눕는건 물론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자유롭게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감옥 주위에는 울타리가 쳐져있고
문에도 이중으로 열쇠가 걸려있었다고 합니다. 이 감옥에 갇힌 사람들 중 3명은 감옥 내에서 사망하였으며,
24명은 나가사키의 서쪽 고개에서 순교 하였다.겐나의대순교라고 불립니다. 8명은 오무라에서 순교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스즈타 감옥’ 고려인 순교이야기
고려인이었던 ‘베드로 아리조’는 스즈타 감옥에 갇혀 있던 이들을 불쌍히 여겨 토마스코사쿠라는 사람에게 부탁해
감옥안으로 몰래 참외를 넣어준다. 하지만 옥지기에게 발각돼 붙잡히게 된 두 사람은 신앙을 버릴 것을 강요하는
고문을 당하지만 끝까지 믿음을 지켜 1619년 7월 19일 니시자카에서 참수 당하였다고 한다.
구지마(玖島) 감옥(오무라 감옥)에서, 호코바루처형장까지는 약 3킬로 정도의 일직선의 길입니다.
그 도중에 눈물 바위가있습니다. 예전에 이곳은 처형장의 입구이었기 때문에 처형되는
사람들이 가족과 여기에서 최후의 이별을 했던 자리였습니다.
수많은 가족들이 흘린 눈물로이끼가 자라는 틈도 없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눈물로 가족과의 헤어짐을 끝마친 사람들은 그대로 일직선으로 나아가고,
최후의 조사를 받은 뒤 잇달아 참수되었습니다.
순교 비석에는 처형전 최후의 조사를 받는 크리스천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코오리 쿠즈레 당시 호코바루 처형장에서 목이 잘린 131인의 순교자의 몸체를
인근 인적이 드문 대나무 숲 속에 두 개의 구덩이를 파고 매장하였다고 하는데,
매장 후 3일 만에 몸체를 다시 파내어 오무라만에 버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기독교인들의 부활을 두려워 하여, 몸과 머리를 분리 해서 묻었다고 전해 진다.
몸체 무덤 기념비에서 북쪽으로 600m 정도 떨어진 곳에
131인의 머리가 매장된 것으로 전해지는
순교자 머리 무덤 유적지 碑(비)가 세워져 있다.